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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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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연방은 나폴레옹 몰락 후 빈 회의를 통해 1815년 결성된, 독일 지역의 39개 영방국가들이 연합한 느슨한 형태의 정치체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의장국을 맡았으며, 프랑크푸르트에 연방 의회가 설치되었다. 1848년 혁명으로 기능이 정지되기도 했지만, 1850년 회복되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해체되었고,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북독일 연방이 결성되었으며, 1871년 독일 제국으로 통일되었다. 독일 연방은 오늘날 독일 연방공화국의 법적, 제도적 기틀에 영향을 미쳤으며, 독일 역사에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도구로 여겨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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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방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1815년의 독일 연방
1815년의 독일 연방
독일 연방의 국가들, 1815–1866
1815–1866년 독일 연방의 국가들
기본 정보
공식 명칭(독일어)
일반 명칭독일 연방
연결 명칭독일 연방
지위국가 연합
존속 기간1815년–1848년, 1850년–1866년
시작 연도1813년
종료 연도1866년
이전 국가신성 로마 제국
라인 동맹
프로이센 왕국
라우엔부르크-뷔토우
드라하임
림부르흐 주 (1815년-1839년)
오스트리아 제국
오시비엥침 공국
자토르 공국
독일 제국 (1848년-1849년)
계승 국가독일 제국 (1848년-1849년)
북독일 연방
오스트리아 제국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덴 대공국
림부르흐 공국 (1839년-1867년)
룩셈부르크 대공국
리히텐슈타인 공국
헤센 대공국
수도프랑크푸르트
공용어독일어
저지 독일어
체코어
슬로베니아어
폴란드어
림뷔르흐어 및 기타
종교가톨릭교
개신교
통화(1857년까지)
(1857년까지)
(1857년부터)
정치 체제
정부 형태국가 연합
수장 직함오스트리아의 "대통령 권력" 수장
초대 수장프란츠 1세
초대 수장 임기1815년–1835년
제2대 수장페르디난트 1세
제2대 수장 임기1835년–1848년
제3대 수장프란츠 요제프 1세
제3대 수장 임기1850년–1866년
입법부연방 의회
연대기
신성 로마 제국 해체1806년 8월 6일
독일 전쟁1813년 3월 17일
라이프치히 전투1813년 10월 18일
독일 연방 헌법 채택1815년 6월 8일
독일 혁명1848년 3월 13일
올뮈츠 굴욕1850년 11월 29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년 6월 14일
북독일 연방 조약1866년 8월 18일
프라하 조약 (1866년)1866년 8월 23일
국기
독일 연방 문장
독일 연방 문장
기타
국가









국가 (일본어)독일
국가 (한국어)독일
국가 (독일어)독일 연방

2. 역사적 배경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후, 나폴레옹은 라인 연방을 통해 독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랑스의 경계를 1789년의 국경으로 되돌리고, 라인란트의 대부분을 프로이센에 귀속시켰다. 또한 독일의 영방국가들을 모아 38개로 정리하고, 이들과 라인 동맹,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을 합쳐 독일 연방을 창설할 것을 결정했다.

독일 연방은 완전한 통일 국가가 아닌 느슨한 국가 연합의 형태였다. 연방의 구성국들은 연방에 적대하는 동맹에 가담할 수 없었으며, 외세의 침입에 공동으로 방어하고 이를 위하여 연방군을 형성했다. 또한 구성국들은 마인츠, 울름, 라슈타트, 란다우, 룩셈부르크의 요새를 공동으로 유지했다. 연방의회는 오스트리아를 의장국으로 하여 연방의 수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다.

1848년 혁명으로 연방의 기능은 일시 정지되었고,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소집되어 새로운 입헌주의 독일 제국을 위한 헌법을 심의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혁명의 불길은 곧 사그라들었고,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의결한 헌법안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새로운 독일 제국의 황제로 한다는 결의안은 당사자를 포함한 각 구성국 군주들로부터 거절당했다. 혁명이 진압된 후 1850년 연방의 기능은 회복되었다.

자유주의 혁명 이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결과, 연방은 와해되었다. 이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북독일 연방,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덴 대공국, 헤센 대공국, 룩셈부르크 대공국으로 분할되었다.

2. 1. 나폴레옹 전쟁과 라인 연방

1806년 나폴레옹은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등 16개 독일 국가를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에 둔 라인 연방을 수립하였다.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작센, 베스트팔렌 등 다른 독일 국가들도 라인 연방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덴마크 홀슈타인, 스웨덴 포메라니아는 라인 연방에 가입하지 않았다.

2. 2. 빈 회의와 독일 연방의 구상

1806년부터 1815년까지 프랑스의 경계가 라인강까지 확장되었고 나폴레옹은 라인강 동안에 라인 연방을 창설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빈 회의에서는 프랑스의 경계를 1789년의 국경으로 되돌리고, 라인란트의 대부분을 프로이센에 귀속시키며, 독일의 영방국가들을 모아 38개로 정리하고, 이들과 라인 동맹,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을 합쳐 완전한 단일 주권을 가지는 독일 연방을 창설할 것을 결정했다.

1812년부터 1814년 겨울까지 이어진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면서 독일은 해방되었다. 1814년 독일의 애국자 하인리히 폰 슈타인은 해체된 라인 연방을 대체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에 중앙 관리 당국을 설립했지만, 빈 회의에서는 이보다 느슨한 형태의 연합을 만들고자 했다.[1]

3. 독일 연방의 성립과 구성

1815년 빈 회의의 결과 독일 연방 규약이 체결되면서 독일 연방이 성립되었다.[7] 독일 연방은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4개의 자유시(뤼베크, 프랑크푸르트, 브레멘, 함부르크) 등 39개의 영방으로 구성되었다.

독일 연방의 구성국들은 완전한 주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프랑크푸르트에 상설된 연방 의회에 대표를 파견했다. 연방 의회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의장으로 하여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다.

1806년부터 1815년까지 나폴레옹은 라인강 동안에 라인 연방을 창설했으나, 빈 회의에서 프랑스의 경계를 1789년의 국경으로 되돌리고, 라인란트의 대부분을 프로이센에 귀속시키며, 독일의 영방국가들을 38개로 정리하고, 라인 동맹,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을 합쳐 독일 연방을 창설했다.

오스트리아 제국프로이센 왕국은 연방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회원국이었다. 두 나라의 상당 부분은 이전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연방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군대의 대부분도 연방군에 편입되지 않았다.

3. 1. 연방 의회

프랑크푸르트에 상설된 Bundestag des Deutschen Bundes 또는 Bundesversammlung|label=연방 의회de는 독일 전체와 관련된 현안을 심의하고 의결하는 역할을 했다.[9] 연방 의회는 각 구성국의 대표들로 구성되었으며, 오스트리아 제국이 의장국을 맡았다.[9]

각 구성국은 연방 의회에서 투표권을 가졌으며, 투표 수는 구성국의 크기와 영향력에 따라 달랐다. 오스트리아 제국프로이센 왕국은 각각 1표를 행사했고,[9] 덴마크 국왕(홀슈타인 공국 공작), 네덜란드 국왕(룩셈부르크 대공국 대공), 영국 왕(하노버 왕국 왕)도 각각 1표를 행사했다.[9]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헤센 대공국, 바덴 대공국, 헤센 대공국과 같은 6개의 비교적 큰 구성국도 각각 1표를 가졌다.[9] 나머지 23개의 군소국가들은 총 5표를, 뤼베크, 프랑크푸르트, 브레멘, 함부르크의 4개 자유시는 총 1표를 나누어 행사했다.[9]

연방 의회 의원은 제후국의 보통선거로 선출된 관리, 대학교수 등 시민 계급의 대표가 맡았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도 연방 의회 의원 중 한 명이었다.

3. 2. 구성국의 다양성

빈 회의를 통해 독일 연방은 38개의 국가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크기, 정치 체제, 경제력 등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7] 오스트리아 제국프로이센 왕국은 연방 내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으며, 연방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다. 이 두 국가는 연방 의회에서 각각 1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덴마크의 국왕은 홀슈타인 공국의 공작으로서(1864년까지), 네덜란드의 국왕은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대공으로서, 영국의 왕은 하노버 왕국의 왕으로서(1837년까지) 연방 의회에서 각각 1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바이에른, 작센,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덴, 헤센 대공국 등 6개의 비교적 큰 국가들도 각각 1표를 행사했다.

나머지 23개의 소규모 국가들은 연방 의회에서 총 5표를 나누어 행사했으며, 뤼베크, 프랑크푸르트, 브레멘, 함부르크의 4개 자유시는 총 1표를 나누어 행사했다.

다음은 독일 연방의 구성국 목록이다.[7]

깃발회원국비고
--안할트-베른부르크1863년 안할트-데사우 공작에게 상속됨
--안할트-데사우
--안할트-쾨텐1847년 안할트-데사우 공작에게 상속됨; 1853년 안할트-데사우와 합병
--오스트리아 제국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시아 등의 보헤미아 왕관령오스트리아, 카린티아, 크라인, 리토라레 등의 오스트리아 영토
--바덴
--바이에른
--브라운슈바이크
--하노버1866년 9월 20일 프로이센에 병합됨
--헤센 선제후령헤센-카셀로도 알려짐; 1866년 9월 20일 프로이센에 병합됨
--헤센 대공국헤센-다름슈타트로도 알려짐
--헤센-호름부르크1817년 가입; 1866년 3월 헤센-다름슈타트 대공에게 상속됨; 1866년 9월 20일 프로이센에 병합됨
--호엔촐레른-헤힝엔1850년 프로이센의 일부가 됨
--호엔촐레른-지그마링엔1850년 프로이센의 일부가 됨
--홀슈타인15세기부터 덴마크 국왕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로서 인적 동군 연합으로 보유
--리히텐슈타인
림부르크네덜란드 국왕이 공작을 겸임
--리페-데트몰트
--룩셈부르크네덜란드 국왕이 대공을 겸임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메클렌부르크-스트렐리츠
--나사우1866년 9월 20일 프로이센에 병합됨
--올덴부르크
--프로이센
--로이스 장자 계열
--로이스 단자 계열
--작센-코부르크-잘펠트1826년 작센-코부르크-고타가 됨
--작센-고타-알텐부르크분할되어 1826년 작센-알텐부르크가 됨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공국이 분할되고 통치자는 1826년 작센-알텐부르크 공작이 됨
--작센-라우엔부르크1815년부터 덴마크가 보유[8]
--작센-마이닝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작센
--샤움부르크-리페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슈바르츠부르크-존더스하우젠
--발데크-피르몬트
--뷔르템베르크
--브레멘
--프랑크푸르트1866년 9월 20일 프로이센에 병합됨
--함부르크
--뤼벡


4. 독일 연방의 운영과 한계

독일 연방은 완전한 통일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한계를 안고 있었다. 구성국들은 각자의 주권을 유지했으며, 연방 의회의 결정에 구속되지 않았다. 군사, 외교, 경제 정책 등 중요한 문제에서 구성국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1815년 빈 회의에서 독일 연방 규약에 따라 성립된 독일 연방은,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을 범위로 하여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등 39개의 영방과 제국 자유 도시 (뤼벡, 프랑크푸르트, 브레멘, 함부르크)로 구성되었다.[28] 연방의 유일한 기관은 연방 의회였으며, 각 주 정부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다. 의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되었고, 오스트리아 대표가 의장을 맡았다.[28]

연방은 외세의 침입에 공동으로 방어하고 연방군을 형성했으며, 구성국들은 마인츠, 울름, 라슈타트, 란다우, 룩셈부르크의 요새를 공동으로 유지했다.[28] 그러나 연방군은 구성국 군대의 연합체 성격이 강했고, 동원이 느리며 정치적 제약이 많았다.

1848년 혁명으로 연방의 기능이 정지되기도 하였으나, 혁명 진압 후 1850년에 기능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연방의 존립이 위협받기 시작했고, 결국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결과 연방은 해체되었다.[28]

경제적으로는 1834년 프로이센의 주도로 독일 관세 동맹(Zollverein)이 결성되어 회원국 간의 관세를 철폐하고, 무게, 측정 단위 및 통화를 표준화하여 경제 통합을 이루었다.[35] 1842년까지 대부분의 독일 국가들이 관세동맹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경제 통합은 슐레지엔 직조공들의 1844년 반란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37]

관세동맹(Zollverein)과 독일 통일

4. 1. 연방군

독일 연방군은 주로 프랑스를 비롯한 외부의 적들로부터 독일 연방을 집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되었다.[9] 연방 의회는 선전포고권을 가지고 군 최고 사령관과 각 군단 사령관을 임명할 권한을 가졌다.[11] 그러나 실제로는 구성국 군대의 연합체 성격이 강했고, 동원이 느리며 정치적 제약이 많았다.[11]

연방군은 여러 차례 연방 집행과 연방 개입에 동원되었다.[9] 1863년 연방은 홀슈타인 공작(덴마크 국왕)에 대해 연방 집행을 명령했고, 연방군은 회원국인 홀슈타인을 점령했다.[10] 또한 1848년 4월 바덴 혁명가들의 습격과 같은 상황에서 연방 개입이 이루어졌다.[10]

1848년 혁명 당시 연방군은 혁명 진압에 실패했고, 연방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10] 1866년 6월 연방 의회는 프로이센에 대한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지만, 이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이어져 연방의 해산을 초래했다.[9]

독일 연방군은 10개의 군단(후에 예비군단이 추가됨)으로 나뉘었다.[11] 각 군단은 회원국의 국가 군대에서 구성되었으며, 한 국가의 모든 군대를 포함하지는 않았다.[11] 예를 들어, 프로이센 군대는 9개 군단으로 구성되었지만 독일 연방군에는 3개 군단만을 제공했다.[11]

1835년과 1860년의 독일 연방군 병력 규모 예상치는 다음과 같다.[12]

국가면적 [km2]인구[13]징병 등급[14]
(전체의 비율)
연간 지출
(오스트리아 굴덴)
군단총 병력[15]
오스트리아 제국[16][17] 197,573[17] 10,086,90031.4%9,432,000I, II, III158,037
프로이센 왕국[18][17] 185,496[17] 9,957,00026.5%7,956,000IV, V, VI133,769
바이에른 왕국76,2584,120,00011.8%3,540,000VII59,334
하노버 왕국38,4521,549,0004.3%1,299,000X (제1사단, 일부)21,757
뷔르템베르크 왕국19,5041,547,4004.6%1,389,000VIII (제1사단)23,259
작센 왕국14,9931,480,0004.0%1,194,000IX (제1사단)20,000
바덴 대공국15,2691,175,0003.3%993,000VIII (제2사단)16,667
헤센-다름슈타트 대공국7,680720,0002.2%615,000VIII (제3사단, 일부)10,325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13,304455,0001.2%357,000X (제2사단, 일부)5,967
메클렌부르크-스트렐리츠 대공국2,92985,0000.2%72,000X (제2사단, 일부)1,197
올덴부르크 대공국6,420250,0000.7%219,000X (제2사단, 일부)3,740
룩셈부르크 대공국 (림부르크 공국 포함)2,586259,5000.4%120,000IX (제2사단, 일부)2,706
작센-바이마르 대공국3,593233,8140.7%201,000예비군 (일부)3,350
헤센 선제후국9,581629,0001.9%564,000IX (제2사단, 일부)9,466
안할트-데사우 공국84057,6290.2%57,000예비군 (일부)1,422
안할트-쾨텐 공국[19]72736,0000.1%30,000예비군 (일부)325[20]
안할트-베른부르크 공국[21]78043,3250.1%36,000예비군 (일부)616
브라운슈바이크 공국3,690245,7830.7%20,000X (제1사단, 일부)3,493
홀슈타인 공국과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22]9,580450,0000.1%35,000X (제2사단, 일부)6,000
나사우 공국4,700360,0001.0%300,000IX (제2사단, 일부)6,109
작센-알텐부르크 공국1,287114,0480.3%99,000예비군 (일부)1,638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23]2,688156,6390.4%111,000예비군 (일부)1,860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 공국[24]000%0예비군 (일부)0[25]
작센-마이닝겐 공국2,293136,0000.4%114,000예비군 (일부)1,918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공국90642,3411.4%420,000VIII (제3사단, 일부)356[26]
호엔촐레른-헤힝겐 공국23617,0000.1%15,000VIII (제3사단, 일부)155
리페-데트몰트 공국1,13377,5000.2%69,000예비군 (일부)1,202
샤움부르크-리페 공국53623,1280.1%21,000예비군 (일부)350
리히텐슈타인 공국1595,8000%6,000예비군 (일부)91
라이히스 공국 (장자 계열)31624,5000.1%21,000예비군 (일부)1,241
라이히스 공국 (단자 계열)82659,0000.2%51,000예비군 (일부)라이히스 공국(장자 계열) 참조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공국94060,0000.2%54,000예비군 (일부)899
발덱 공국1,12156,0000.2%51,000예비군 (일부)866
슈바르츠부르크-존더스하우젠 공국86251,7670.2%45,000예비군 (일부)751
헤센-훔부르크 방백령[27]27523,0000%21,000예비군 (일부)333
뤼베크 자유 도시29845,6000.1%39,000X (제2사단, 일부)669
함부르크 자유 도시410154,0000.4%129,000X (제2사단, 일부)2,163
브레멘 자유 도시25652,0000.2%48,000X (제2사단, 일부)748
프랑크푸르트 자유 도시10154,0000.2%48,000예비군 (일부)1,119


4. 2. 경제적 통합 노력: 관세동맹

1834년 프로이센의 주도로 독일 관세 동맹(Zollverein)이 결성되면서 연방 개선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은 법령을 통해 더 광범위한 무역 이점을 얻고 산업 발전을 촉진하고자 했다. 이는 독일 내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경제를 개선하며, 소규모 국가들의 경제적 독립성을 약화시켜 잠재적인 프랑스의 공격에 대비하여 독일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35]

관세동맹은 공통 시장을 열고, 회원국 간의 관세를 철폐했으며, 회원국(오스트리아 제외) 내에서 무게, 측정 단위 및 통화를 표준화하여 원형 국가 경제의 기반을 형성했다.[36] 1842년까지 대부분의 독일 국가들이 관세동맹에 포함되었다.

이후 20년 동안 독일 제철소의 생산량은 4배 증가했고, 석탄 생산량도 급증했다. 독일 산업은 강철포, 주철 강철 차축, 후장식 소총 등을 도입하여 독일의 무기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독일 제조업체들은 민간 부문에도 대량으로 생산하여, 이전처럼 영국이 독일의 제조품 수요의 절반을 공급하지 않게 되었다.[37] 프로이센은 강력한 산업 기반을 개발하여 중산층과 민족주의 운동을 강화했고, 경제 통합은 정치적 통일을 더욱 가능성 있게 만들었다.

관세동맹은 경제 통합과 근대 산업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지만, 슐레지엔 직조공들의 1844년 반란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또한 연방 내 오스트리아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면서 경제적 통일이 정치적 통일과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5. 1848년 혁명과 독일 연방

1848년 혁명의 영향으로 독일 연방 전역에서 자유주의,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각국에서 헌법 제정, 의회 설립, 언론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는 시위와 봉기가 일어났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국민 의회가 소집되어 통일 독일 헌법 제정과 통일 국가 수립 방안을 논의했다.

1848년 혁명 이전 시기("3월 이전", 독일어: Vormärz)에는 빈 회의 이후 표면적으로는 안정된 것처럼 보였지만, 보수 세력과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이 갈등은 구체제 세력과 프랑스 혁명 및 인권 선언에서 영감을 받은 세력 간의 대립이었다.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 루트비히 울란트, 게오르크 헤르베흐,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뷔히너, 루트비히 뵈르네, 베티나 폰 아르님 등의 인물들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 프리드리히 얀 신부의 체조 협회는 중산층 독일 청년들에게 민족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사상을 전파했고, 이는 부르셴샤프트로 알려진 민족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대학 학생회 형태로 나타났다.

1817년 바르트부르크 축제마르틴 루터를 독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기념하며 루터교와 독일 민족주의를 연결, 독일 국민 국가를 위한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 축제에서는 반동적인 태도를 상징하는 여러 책과 물품을 불태웠는데, 그중 하나는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의 책이었다. 1819년, 코체부는 러시아 스파이 혐의로 신학생 칼 루트비히 잔트에게 살해당했고, 이는 메테르니히에게 1819년 카를스바트 칙령을 발표하여 부르셴샤프트를 해산하고 자유주의 언론을 탄압하며 학문의 자유를 제한하는 구실을 제공했다.[28]

1848년 혁명으로 연방의 기능은 정지되었다가, 혁명이 진압된 후 1850년에 기능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연방의 존립은 다시 위협받기 시작했다.

5. 1.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

1848년 혁명 소식이 독일에도 전해지면서, 자유주의자, 공화주의자, 급진적인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1848년 3월, 바덴(Baden)에서 시작된 혁명은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등 다른 독일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민중의 요구에 굴복하여 헌법 제정과 의회 설립, 독일 통일을 약속했다.[38][39]

1848년 5월 18일, 여러 독일 국가의 대표들이 모여 프랑크푸르트 의회(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를 열었다. 그러나 의회는 통일 방안을 두고 소독일주의와 대독일주의로 분열되었다. 소독일주의는 프로이센 중심의 통일을, 대독일주의는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통일을 주장했다.

의회는 독일 국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고 헌법을 제정하여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독일 황제 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는 "하수구에서 왕관을 주워 쓸 수 없다"며 거절했다. 보수 세력의 반격과 군주들의 군대를 동원한 반란 진압으로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결국 해산되었다.

5. 2. 혁명 이후 독일 연방의 복구와 한계

1848년 혁명으로 독일 연방의 기능은 정지되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소집되어 새로운 입헌주의 독일 제국을 위한 헌법 심의가 이루어졌으나, 자유주의적 혁명의 불길은 곧 사그라들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의결한 헌법안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새로운 독일 제국의 황제로 추대하는 결의안은 당사자를 포함한 각 구성국 군주들에게 거절당했다. 혁명이 진압된 후 1850년 연방의 기능은 회복되었다.[28]

그러나 자유주의 혁명이 아닌 새로운 요소가 연방의 존립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간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결과, 연방은 와해되었다. 이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북독일 연방,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덴 대공국, 헤센 대공국, 룩셈부르크 대공국으로 분할되었다.

6. 독일 연방의 해체와 북독일 연방의 성립

1848년 혁명으로 독일 연방의 기능은 일시 정지되었으나, 혁명이 진압된 후 1850년에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연방의 존립은 위협받기 시작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독일 연방은 해체되었다. 프로이센은 마인 강 이북의 독일 국가들을 통합하여 북독일 연방을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덴 대공국, 헤센 대공국,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연방에서 분리되었다. 북독일 연방은 이전의 느슨한 연합체들과 달리 실질적인 연방 국가였으며, 이는 이후 독일 제국으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6. 1.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7주 전쟁)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은 독일 연방 내 주도권을 둘러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간의 갈등이 폭발한 전쟁이다. 비스마르크의 주도 하에 프로이센은 군사력을 강화하고, 오스트리아를 고립시키는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전쟁의 결과, 독일 연방은 와해되었다.[42]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북독일 연방을 수립하고,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통해 남독일 국가들을 흡수하여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1871년 1월 18일,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한 모든 국가를 포함하는 독일 제국이 성립하였다.

1866년 8월 23일, 프라하 조약에서 오스트리아는 연방의 해체를 수용해야 했다.[42] 다음 날, 나머지 회원국들은 해체를 확인했다. 이 조약은 프로이센이 독일 북부에 새로운 형태의 연방(Bundesverhältnis|분데스페어헬트니스de)을 창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남독일 국가들은 남독일 연방을 만들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성립되지 않았다.

6. 2. 북독일 연방과 독일 제국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결과, 독일 연방은 해체되었다. 이후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북독일 연방이 수립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덴 대공국, 헤센 대공국,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분리되었다. 북독일 연방은 이전의 느슨한 연합체들과 달리 실질적인 연방 국가였다. 북독일 연방의 영토는 마인 강 이북의 옛 독일 연방 영토, 프로이센 왕국동프로이센 영지, 슐레스비히까지 포함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북독일 연방은 남부 독일 국가들을 흡수했다. 1871년 1월 18일, 오스트리아 제국,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한 옛 독일 연방의 모든 구성국을 포함하는 독일 제국이 성립되었다.[43] 프로이센 국왕은 독일 황제 칭호를 받았으며, 북독일 연방 의회는 독일 제국 의회(라이히스타크, ''Reichstag'')로 변경되었다.[43]

7. 독일 연방의 유산

독일 연방은 비록 완전한 통일 국가는 아니었지만, 독일 통일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3월 혁명으로 존속이 위협받았으나 1849년에 부활했다. 그러나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독일 연방을 해체하고, 이듬해 1867년 북독일 연방을 성립시켜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후일 독일 제국의 모체가 되었다.

독일 연방 시기에 나타난 제도와 기구들은 이후 독일의 정치, 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연방 의회는 각 주 정부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으며,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되었다.[44]

"독일 연방"이라는 번역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독일 동맹"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다.[51] "독일 연합"[52]이나 "독일 국가 연합"[53] 등의 다른 번역어도 사용된다.

7. 1. 현대 독일과의 연관성

현대 독일 연방공화국은 1867년 북독일 연방의 법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북독일 연방은 연방 국가로서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졌지만, 1815년부터 1866년까지 존속했던 독일 연방의 논의와 사상은 북독일 연방 헌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회원국 대표 기관인 연방 의회는 독일 연방의 연방 의회를 모방한 것이다. 1867년 연방 의회의 후계자는 오늘날 독일 연방공화국의 연방의회이다.[45]

독일 연방은 독일 역사 서술과 국가 문화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으며, 주로 자유주의적, 민주적,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도구로 부정적으로 여겨진다. 반면, 3월 혁명(1848/49)과 관련 사건 및 제도는 더 많은 관심과 헌신을 받는다. 가장 중요한 기념지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화 공간인 프랑크푸르트의 파울스키르헤와 라스타트 성의 ''독일 역사의 자유 운동 기념관''이다.

2008년 6월 14일 프랑크푸르트의 파울스키르헤: 독일 해군이 라이히스플로테(Reichsflotte) 창설 결정 16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연방 요새의 잔해는 적어도 지역적으로 또는 군사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특정한 관광 명소이다.

참조

[1] 뉴스 Wer sind wir, und was wollen wir dazu singen? https://www.faz.net/[...]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2012-09-14
[2] 서적 Deutsche Verfassungsgeschichte seit 1789. Vol. I: Reform und Restauration 1789 bis 1830 Verlag W. Kohlhammer 1967
[3] 서적 Deutsche Verfassungsgeschichte seit 1789. Vol. I: Reform und Restauration 1789 bis 1830 Verlag W. Kohlhammer 1967
[4] 웹사이트 Deutsche Geschichte 1848/49 http://susi.e-techni[...]
[5] 학술지 The German Confederation and the Consolidation of State Power in the South German States, 1815–1848 1985
[6] 서적 Deutsche Verfassungsgeschichte seit 1789. Band III: Bismarck und das Reich W. Kohlhammer 1988
[7] 서적 A Manual of the History of the Political System of Europe and its Colonies https://books.google[...] H. G. Bohn 1873
[8] 백과사전 Lauenburg http://ia600303.us.a[...] 1910-1911
[9] 서적 Deutsche Verfassungsgeschichte seit 1789. vol. I: Reform und Restauration 1789 bis 1830 W. Kohlhammer 1967
[10] 서적 Deutsche Verfassungsgeschichte seit 1789. vol. 2: Der Kampf um Einheit und Freiheit 1830 bis 1850 W. Kohlhammer 1960
[11] 서적 History of Germany in the Nineteenth Century Jarrold & Sons 1919
[12] 간행물 Beilage zum Militaer-Wochenblatt fuer das deutsche Bundesheer 1860
[13] 문서 For the year 1835 1835
[14] 문서 The matriculation class determined the percentage of expenditures for 1835 1835
[15] 문서 For the year 1860 1860
[16] 문서 Not included Hungary, Transylvania, Galicia (but with Auschwitz and Zator), Dalmatia, Slavonia, Croatia and upper Italian lands apart from Trieste
[17] 문서 federal share
[18] 문서 Without East Prussia, West Prussia, and Posen
[19] 문서 Inherited by the Duke of Anhalt-Dessau in 1847 and formally merged in 1853 1847
[20] 문서 Figures for 1835; merged with Anhalt-Dessau army in 1847 1835
[21] 문서 Merged with Anhalt-Dessau in 1863 1863
[22] 문서 Troops were attached to the Danish army until 1864, as the King of Denmark was also Duke of both lands 1864
[23] 문서 Gotha passed to Saxe-Coburg in 1826 1826
[24] 문서 Partitioned between Saxe-Coburg and Saxe-Meiningen in 1826 1826
[25] 문서 No figures reported before partition
[26] 문서 Figures for 1835; merged with Prussian army in 185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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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학술자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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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서적 Germany from Napoleon to Bismarck: 1800–1866
[35] 학술지 Prussian aims for the Zollverein, 1828–1833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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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서적 The Arms of Krupp, 1587–1968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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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서적 Bismarck and the Development of Germany, Vol. 1: The Period of Unification, 1815–1871 1971
[42] 서적 Deutsche Verfassungsgeschichte seit 1789. Vol. III: Bismarck und das Reich Kohlhammer Verlag 1988
[43] 서적 Deutsche Verfassungsgeschichte seit 1789. Vol. III: Bismarck und das Reich W. Kohlhammer 1988
[44] 서적 Deutsche Verfassungsgeschichte. Vom Alten Reich bis Weimar (1495–1934) Springe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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